Page 54 - 고경 - 2017년 6월호 Vol.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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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무너지면 칡은 말라버리는데 그러면 구절은 어디로 돌 에서만 있음은 제값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아갑니까?” 소산의 질문은 이러한 공존의 미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명초가 말했다. 다. 있음이고 없음이고 나발이고 모든 가치가 무화됐을 때의
“이것을 위산이 들으면 또 한바탕 웃겠는 걸.” 경지를 겨냥한다. 바퀴살과 바퀴살 사이의 공백을 논하고 찬
이에 소산이 크게 깨달았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讚)하는 마음의 아래에는 더 멀리 가고 빨리 가고 싶다는 욕
“위산의 웃음 속에는 칼이 들어 있었구나.” 심이 흐른다.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끝내 제 손에 피를 묻혀
야 하는 마음이다. 이때 소산은 자충수를 두고 마는데, ‘내가
갈등(葛藤)이란 단어는 재미있는 어원을 가졌다. 칡과 등은 개고생을 해서 당신에게 왔으니 당신은 반드시 답을 주어야 한
모두 덩굴 식물이어서 다른 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는 특성을 다는’ 보상심리가 눈에 거슬린다. 소를 제 입으로 잡아먹어놓고
지녔다. 덩굴식물은 종별로 나무줄기를 감는 방향이 정해져 소가 어디 있느냐고 찾는 노릇이니, 위산은 웃을 수밖에.
있는데, 칡은 왼쪽으로만 등나무는 오른쪽으로만 올라간다.
칡과 등이 한 나무에 얽히면 모습부터 몹시 기괴할 뿐 아니 제88칙 — ●
라 나무의 생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갈등의 해결은 보통 칡 능엄경의 보지 못함(楞嚴不見, 능엄불견)
이든 등이든 한쪽이 말라죽어야만 이뤄진다. 생장속도를 조
금씩 늦추면서 공생하는 경우도 보인다. 인간의 갈등도 대개 『능엄경』에서 비롯된 공안(公案) :
이러한 방식으로 일단락된다. 부처님이 제자인 아난에게 말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有之以爲利(유지이위리) 無之以爲用(무 “우리가 눈으로 보고 사물을 안다는 것은 사물에 의해서 생기는
지이위용)’이라고 말했다. 있음이 가치를 지니는 까닭은 없음이 결과가 아니다. 만약 우리의 눈으로 보고 안다는 주체가 대상에
어떤 기능을 하기 때문‘이란 뜻이다. 그는 우마차의 바퀴살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주관이라 할 수 없고 객관이다. 객관이라면
효용을 얻는 이유는 바퀴살 사이의 공백 때문이라는 비유도 내가 보지 않을 때에도 그 보지 않은 곳은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
남겼다. 그릇은 비어있기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다. 집의 평수 겠느냐. 만약 내가 보지 못하는 곳을 너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를 넓히는 방법은 돈을 벌어서 더 큰집으로 이사하는 방법이 본다는 작용이 사물에 의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이다. 그러나 집안의 쓸데없는 물건을 버린다면 시간과
수고를 덜 들이고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이렇듯 없음이란 근본 ‘나’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이중적이다. 일단 독립적이고 고
● 고경 2017. 06. 52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