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고경 - 2017년 9월호 Vol.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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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였으므로 위와 같은 대규모의 불사를 준비할 수 있었을 것
이다. 또한 연수선사 역시 960년에 영은사(靈隱寺)의 제1세 사
주가 되었다가, 그 다음해인 961년에는 영명사(永明寺)의 제2
세 사주가 되어 입적할 때까지 영명사에 주석하였다. 지금도
항주에 가보면, 항주의 상징인 서호(西湖) 주변으로 엄청난 규
모의 사찰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영
은사는 오늘날에도 불학원 (佛學院)을 포함하여 많은 불교기
관들이 있고, 정자사(淨慈寺)로 이름이 바뀐 영명사 역시 큰
규모의 도량으로 현존하고 있다.
이처럼 연수선사는 오월국의 중심지였던 항주에서도 가장
요지에 주석했기 때문에 국왕이 일으킨 여러 종류의 불사에
필히 깊은 인연을 맺었을 것이다. 국왕이 대장경을 제작하는 태지의 (天台智顗, 538-597)가 쓴 『법화현의(法華玄義)』에 나오는
과정에서 선사 역시 평소에는 잘 대하지 못했던 많은 경들을 문장인데, 전란을 겪으면서 그 책이 다 사라졌고, 오직 고려
접했을 것이고, 그 가운데서 자신이 생각하는 핵심적인 내용 에만 있다고 말씀드렸다. 이에 충의왕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을 뽑아 소개함으로써, 당시의 불교도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 어 천태 전적을 구해오도록 했고, 당시 고려의 광종(光宗, 925-
려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975)은 제관법사에게 천태의 전적을 갖고 가서 중국에 전하
한편 『천태사교의 (天台四敎儀)』를 남겼던 고려의 제관(諦觀) 도록 명하였다. 제관법사는 961년 중국에 도착하여 천태산에
법사가 다양한 천태 전적을 갖고 찾아간 곳 역시 오월국이다. 들어가 의적 법사에게 수학하고, 10년간 머물다가 그곳에서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오월국의 충의왕은 불서 읽기를 좋아 입적했다고 한다.
하였는데, 어느 날 영가현각(永嘉玄覺, 637-713)이 쓴 『선종영가 제관법사가 961년에 오월국에 도착했다면, 아마 항주에서
집 (禪宗永嘉集)』 가운데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구절을 발견하 큰 명성을 떨쳤던 연수 선사를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려
였다. 이에 연수선사의 스승인 천태덕소(天台德韶, 891-972) 선 의 광종 역시 연수 선사의 저술을 읽고 무척 감탄했다는 얘
사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덕소선사는 다시 천태종의 의적 (義 기가 있는데, 양국의 스님들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지금 우리
寂) 법사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의적 법사는 그 문구가 천 의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문물들이 교류되었을 것이고,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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