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고경 - 2017년 11월호 Vol.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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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광활한 우주를 돌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계절의 울 A와 거울 B가 있다. 두 개의 거울은 서로를 의지해야만 비
변화를 만들고, 따사로운 봄 햇살은 생명의 온기를 베풀고, 대 로소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다. 거울 A는 거울 B 속으로 들어
기의 흐름은 구름을 움직이고, 바다와 강물은 그 구름을 타 갈 때 비로소 자신이 드러날 수 있고, 거울 B 역시 거울 A 속
고 온 대지를 적셨다. 그렇게 소쩍새 울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 으로 들어가야만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의 존재는 다른
무수한 낮과 밤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하나의 씨앗이 발아할 존재 속으로 깊이 침투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수 있었다. 그런 참여와 은혜는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도 일어 이렇게 보면 거울 A는 곧 거울 B가 되고, 거울 B는 곧 거울
난다. 토양 속의 미생물들은 부지런히 나뭇잎과 무기물을 분 A가 된다. 이런 관계를 ‘즉(卽)’이라고 한다. 거울 A가 ‘곧[卽]’
해하고, 뿌리는 이름 없는 존재들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고, 벌 거울 B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두
과 나비들은 꽃들의 사랑을 맺어주었다. 한 송이 들국화는 온 개의 거울이 벌이는 상호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이를 ‘상즉(相
우주의 참여와 배려 속에 피어난 것이다. 卽)’이라고 한다. ‘나는 곧 너이고’, ‘너는 곧 나’라는 불이(不二)
이것이 바로 개체가 전체를 ‘받아들임 [容]’으로써 일어나는 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는 ‘상
기적이다. 그러나 이런 받아들임의 관계는 전체에서 개체로 호의지 (互相依支)’, 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관계에 있어 서
가는 일방적인 관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개 로 불가분에 있다는 것이 상즉이다.
체라도 전체의 생성과 유지를 위해 전체의 무게만큼 크게 동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
참한다. 전체는 무수한 개체들의 관계와 활동이 만들어낸 질 시색 (空卽是色)’ 역시 이와 같은 상즉의 논리다. 색(色)이 개별
서이기 때문이다. 개체의 활동은 전체의 질서를 만들고, 전체 적 존재를 의미한다면 공(空)은 개별존재를 초월한 전체 또는
를 움직이게 하는 생명을 불어넣는다. 연기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개체가 곧 전체’
라는 ‘일즉일체 (一卽一切)’가 되고, 반대로 ‘전체가 곧 개체’라
거울의 비유와 서로 들어가기[相入] 는 ‘일체즉일 (一切卽一)’이라는 관계가 된다.
개체와 전체가 이렇게 서로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관계 거울 A가 자신을 고집하면서 거울 B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
를 화엄에서는 ‘상용(相容)’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울의 비유를 면 거울 A의 존재는 드러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존재
통해 이와 같은 상호 받아들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 는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다른 존재 속으로 들어가야만[相入]
의 거울은 만물을 비출 수 있지만 그 자신은 비출 수 없다. 그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 식물도 암술과 수술이 서로에게 들어
래서 모든 존재를 비추려면 두 개의 거울이 필요하다. 여기 거 가야만 열매가 생기고, 동물도 정자와 난자가 서로 침투해 들
● 고경 2017. 11. 2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