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 - 고경 - 2017년 11월호 Vol.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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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야만 생명이 잉태된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자신을 고집 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자신의 눈동자에 비친 영상
하지 않고 다른 존재 속으로 들어가서 타자가 되어야 비로소 을 통해 상대를 보는 관계적 인식은 곧 부처님의 인식과 다름
자신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화엄에서는 ‘들어감 없다.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入]’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지혜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지만 어떤 걸림도 없는 ‘상통무애
(相通無碍)’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자연현상들이다. 국화 홀씨 서로에게 들어가되 같지 않다[不同]
는 자연이라는 전체 속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한 송이 국 그런데 받아들임은 들어옴을 전제로 한다. 나는 네게로 들
화를 피울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개체가 전체의 질서 속으 어가고, 너는 내게로 들어오는 상호침투를 ‘상입 (相入)’이라고
로 들어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일입일체 (一入一切)’라고 한 했다. 이렇게 서로에게 들어가면 네가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다. 전체 역시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개체 속 네가 되는 ‘상즉(相卽)’의 관계가 된다. 이처럼 네가 곧 나이고,
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존재하는데 이를 ‘일체입일 (一切入一)’이 내가 곧 너라면 너와 나라는 개별적 경계는 완전히 사라지고
라고 한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는 ‘상용(相容)’은 이것 그냥 ‘우리’라는 전체만 존재하는가?
이 저것 속으로 들어가고, 저것이 이것 속으로 들어가는 ‘상입 이에 대한 화엄의 답은 내가 네 속으로 들어가고, 네가 내
(相入)’의 관계로 성립된다. 개체는 전체 속으로 들어가고, 전체 속으로 들어와도 여전히 너는 너 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의
는 개체 속으로 들어가서 각각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에 개 개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나와 너는 ‘부동(不同)’ 즉 같지
체와 전체는 서로에게 들어가는 ‘일다상입 (一多相入)’이 된다. 않기 때문이다. 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그와 같은 개체와 전체
거울의 비유와 유사한 개념이 ‘눈부처’이다. 눈부처란 상대 라는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치 요철 (凹凸)처
방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말한다. 나의 존재는 럼 아귀가 맞는 법이다. 이렇게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또
너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나라는 개체가 성립 같은 것을 이해하는 것이 화엄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세 번
된다. 반대로 너 역시 나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와 영상으로 째 문이다.
맺힐 때 너는 존재한다. 나는 네 속으로 들어가고, 너는 내 속 거울의 비유에서 보듯이 이 거울은 저 거울로 인해 있고,
으로 들어와야만 나와 네가 존재할 수 있다. 존재의 이와 같 저 거울은 이 거울로 인해 있다. 눈부처의 관계에서 보듯 나
은 연기적 관계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너를 인식한다는 것 는 너로 인해, 너는 나로 인해 존재한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은 연기적 실상에 대한 깊은 안목이 열린 것이다. 따라서 상대 서로에게 들어가고, 걸림 없이 왕래하며 소통하는 것이 존재
● 고경 2017. 11.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