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 - 고경 - 2017년 12월호 Vol.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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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늘 이렇게 분리장벽을 만들어
         검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                                                         안과 밖을 구분해 왔다. 중세 유럽에서는 유대인을 격리시키

                                                                               는 게토(ghetto)를 만들었고, 비록 해체되었지만 베를린 장벽
         -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이 그랬고, 한반도의 허리를 갈라놓는 38선은 여전히 존재한
                                                                               다. 이것도 모자라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과 멕시코
         글 : 서재영
                                                                               를 가르는 분리장벽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장벽은 물리적 장벽에 그치지 않고 인종, 종교, 이념
                                                                               등을 근거로 무수한 장벽이 둘러쳐져 있는 것이 중생의 삶이

                                                                               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
                                                                               (境界)’이다. 같은 마을 주민으로 함께 살던 사람들이 경계를
           아파트 담장이 만든 경계                                                       나누는 순간 1단지와 2단지로 구분되고, 일반분양과 임대주
           최근 강남의 한 아파트에 관한 뉴스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택으로 구분된다. 그때부터 소통이 차단되고 각자 자신들의
         씁쓸하게 만들었다. 뉴스에 등장하는 아파트는 명목상으로                                        경계 속에 갇혀 살아가게 된다.

         는 1단지와 2단지로 구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같은 동네에 있                                      세상의 존재들도 이렇게 경계를 만들면서 ‘나’와 ‘너’로 구
         는 동일한 단지였기에 주민들은 단지 구분 없이 자유롭게 왕                                      분된다. 개체의 삶은 그와 같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나와 타
         래하며 살았다. 그런데 단지 내 시설 이용문제를 놓고 갈등이                                     자간의 경쟁으로 펼쳐진다. 경계를 나누기 전에는 서로 소통

         생겨 1단지와 2단지를 분리하는 담장을 쳤다고 한다.                                         하는 하나였지만 경계를 나누는 순간 서로 다른 존재가 되고,
           이런 사례는 비단 이 아파트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같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화엄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
         은 동네에 있는 아파트라도 일반분양과 임대아파트는 담장을                                       들도 한 동네 주민처럼 전체와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경계를
         치고 다른 동네처럼 구분한다고 한다. 그래서 코앞에 있는 학                                     만들면서 나와 나 밖의 타자로 구분되었다. 본래 하나였지만
         교나 관공서를 가려면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본래 같은 동                                     경계를 만드는 순간 너와 대립되는 내가 되고, 나 밖에 있는

         네였고, 한 단지였지만 담장을 치고, 경계를 만드는 순간 다른                                    네가 된 것이다.
         동네 사람이 되고, 소통이 차단되고 고립되는 불편함이 초래                                        나와 남을 구분 짓는 경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데카르트



         ● 고경                                           2017. 12.                                                                2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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