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고경 - 2017년 12월호 Vol.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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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나는 무던히 노력하고 있다. 릉(廬陵)의 쌀값이 얼마이더냐?” 화두에 안목이 트였다. 무엇
보다 ‘나처럼 생각하는 인간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구나’라는
3년간의 『종용록』 연재를 마친다. 직장인으로서 충실했던 사실에 작약했다. 비록 출가는 못했으나 선사들의 흔적이 가
틈틈이 책을 읽었고, 주말마다 읽은 내용에 이런저런 생각을 까이 있기에 그런 대로 자족한다.
섞어서 글로 옮겼다. 『종용록』의 저본은 『굉지송고(宏智頌古)』. ‘여릉’은 꼭 ‘여릉’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이 속한 도시이거나
중국 북송(北宋) 시대를 살았던 굉지정각(宏智正覺)이 이름난 공동체다. 사람은 제가 지닌 재능과 노력과 업보로써 다들 그
선사들의 특출한 언행을 담은 100개의 고칙 (古則)에 송(頌)을 날그날 정해지는 쌀값에 기여하거나 쌀값을 뒤흔들면서 살아
붙인 문헌이다. 여기에 만송행수(萬松行秀)가 시중(示衆)과 평 간다. 나라가 망한다손 쌀값이 소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
창(評唱)을 삽입한 것이 『종용록』이다. ‘종용록’이란 명칭은 만 로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 본성이다. 본성대로 산다는 건 어떤
송이 원고를 집필했던 장소인 종용암(從容庵)에서 유래한다. 방식으로든 어떤 재주로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이끌어가
사실 ‘송’이든 ‘시중’이든 ‘평창’이든, 다들 논평이다. 내가 쓰 는 것이란 생각. 그리고 이렇게 어떻게든 살아있지 않은가. 견
는 글 역시 어차피 논평일 것이므로, 논평의 대상이 되는 ‘본 성 (見性). ‘견’이 곧 ‘성’이다.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칙 (本則)’에만 집중했다. 본칙에는 일상 속 선사들의 모습이 대 깨달아 있는 것이다.
화로 또는 잠언으로 담겼다.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인들의 사
유양식을, 그것도 1000년 전 중국인들의 사유양식을 따라잡 81년 동안(八十一年) 이 한마디뿐(只此一語).
기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내가 최초로 얻은 지성은 선 (禪) 부디 잘들 있게(珍重諸人).
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쓸데없이 떠들지 말고(切莫錯擧).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교수들에게서 특별히 배운 것
은 없다. 1학년 때 유난히 심했다. ‘니체’를 듣고 싶었으나 의 만송행수는 『종용록』을 쓰던 종용암에서 입적했다. 앞선
무적으로 ‘플라톤’을 들어야 하는 시기였다. 출석일수나 관리 선사들의 말과 삶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셈이
하면서 술이나 마시러 다녔다. 이듬해 선불교와 노장사상을 다.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다. 상투적
동시에 수강한 인연이 어쩌면 지금의 인생을 결정한 것인지 인 애도와 송사(送辭)를 금하고 있다. 무심에 대한 오랜 훈고
모른다. 남들은 서양의 분석에 능한 반면 동양의 여백에는 힘 (訓詁)는 무정(無情)을 낳고 초연으로 건너간다. 고요히 살면,
겨워했는데, 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불법이 무엇입니까?” “여 죽음도 안정적이다.
● 고경 2017. 12. 52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