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고경 - 2018년 6월호 Vol.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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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거쳐 정승·판서가 되어 백성을 살피는 훌륭한 인재가 되는 꿈을 으로 ‘은사 스님’이라는 호칭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어른이었다. 동산과 성
꿀 수도 있었겠지만, 현실이 그 길을 아예 가로 막고 있었다. 일본인들을 철의 만남, 성철이라는 큰 그릇을 알아본 동산이 아니었으면 한국불교가
따라 신학문을 배우고 고시에 합격해 총독부 고위 관리가 되거나 “황군 어찌 되었을까.
(皇軍)의 장군”이 되는 길을 택하는 선비의 후손들도 있었다. 그러나 꼿꼿 이영주가 은사 동산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스님 성철이 된 뒤 찍은 이
한 선비 집안의 기백을 물려받은 그의 성품상 그럴 수는 없었다. 이영주가 사진을 보자. 이목구비 (耳目口鼻)가 또렷한 데에다 똑바로 서 있는 자세에
어린 시절부터 동서양 고전을 탐독하고, 『증도가』를 만난 뒤 곧바로 참선 서는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기백이 흘러넘치지 않는가. 꽉 다문 입 속에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대 상황 서 “이제부터 나는 성철이다. 아무도 뚫지 못한 암벽을 뚫고 새 길을 밝혀
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내리라! 내 가는 길에는 그 어떤 장애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향 집에서 가까운 지리산 대원사에서 젊은 이영주가 치열하게 참선하 사자후를 토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고 한국 불
고 있다는 소식은 가야산 해인사에까지 전해졌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교를 살려낼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이 출가한 1936년은 이 땅을 강점하
간다.”고 하지만 참 수행자가 가물에 콩 나듯 희귀했던 그 시절, 젊은 재가 고 있던 일제가 만주를 넘어 중국 본토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불태우면
자가 출가자보다도 더 치열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빠른 속도로 전 서 우리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더욱 거세질 때였다. 난세에 영웅이 나오는
해지는 것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었다. 대원사 주지의 서신을 받은 효 법이다.
당(최범술) 스님이 대원사로 찾아왔다. 효당 스님의 권유에 해인사로 간 이
영주를 당시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던 동산 스님이 발견했고, 동산 스님은
내심 이 청년을 ‘큰 그릇’으로 키워야겠다고 결심 했으리라. 동산 스님이
“참선을 잘하려면 스님이 되어야 한다.”고 출가를 권하지만, 출가와 재가
라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청년 이영주는 쉽게 그 말을 듣지 않
았다. 그러던 중 “여기 길이 있다. 아무도 그 비결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대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는 ….” 동산 스님의 이 결제 법문이 재
가 수행자 이영주의 마음을 움직였다. “내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아무도
滄珠 香山
알려주지 않는 그 비결을 알아내리라!”
1955년 경기도 여주 출생. 책 읽기와 글쓰기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이다. 『조선불교통
큰 그릇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런 큰 울림이 필요했으리라. 이렇게 해 사(근대편)』·『담마난다 스님의 불교이야기』·『한국종교를 컨설팅하다』(공저)·『북한
산성과 팔도사찰』·『향기로운 꽃잎』·『오늘의 읽기 – 이병두가 본 책 속의 세상 X 책
서 가야산 호랑이 성철이 태어났다. 이 호랑이를 낳은 동산 스님은 일반적 밖의 세상』 등의 책을 펴냈고 불교계 여러 매체에 칼럼을 연재했거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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