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고경 - 2018년 6월호 Vol.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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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종정으로 추대되면서다. 물론 불교계 내부에선 큰스님의 이력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 한국불교의 나아갈 길”이라며
 당시 청담·자운 스님 등 20여 명과 봉암사 결사를 주도했었던 일이나, 고

 성 문수암·통영 천제굴·파계사 성전암 등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정진
 (精進)을 거듭한 수행이력은 한국불교의 자랑이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1980년 10월 27일에 발생한 이른바 10·27법난은 큰스님
 의 지도에 의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순간을 맞게 됐다. 10·27법난으

 로 망신창이가 된 한국불교, 특히 조계종단은 숨쉬기조차 버거운 상처를
 입고 허덕이고 있었다.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의 회생 (回生)을 위해 불가피

 하다면 내 이름을 빌려주겠다며 종정직 (宗正職)을 수락했다. 조계종단은
 법난의 후유증을 벗기 위한 시도로써 1981년 종정 성철 스님에 대한 대대

 적인 취임식 행사를 준비했다. 언론매체는 성철 스님의 서울 나들이에 깊
 은 관심을 표명이라도 하듯 행사장인 조계사로 대거 몰려들었다. 산문 밖

 에 절대 발을 내놓지 않은 ‘산승(山僧)의 첫 외출’이라는 수식어를 달며 스
 님을 기다렸지만 스님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채 ‘산은 산이요, 물은 물

 이다’로 압축되는 법어만 보내왔다. 법어 역시 세상에 어떤 가르침을 내린
 다는 내용이라기보다 종정 수락에 대한 수락법어 형태였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
 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는 법어는 일
 반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선설 (禪說)이었지만 대중에 회자(膾炙)됐다.

 그만큼 성철 스님에 대한 기대와 의지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성철 스님은 말 그대로 산승으로서의 본분을 한 번도 거스르지 않았다.                                  ―

 80년대 군부독재의 종식을 요구하는 거센 민주화의 바람 속에서 ‘한 말  산청 겁외사 성철스님기념관에 봉안되어 있는 성철스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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