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1 - 고경 - 2019년 3월호 Vol.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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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대답합니다. 이 문장[대답]에는 ‘나’와 ‘손’이라는 두 개의 명사가 있습

            니다. 명사는 사물을 지시합니다. 그래서 제가 “손이라는 명사가 지시하
            는 것을 당신 눈으로 확인할 수 있죠”라고 확인 시켜줍니다. 그런 다음 “그

            렇다면 ‘나’라는 명사가 지시하는 것을 봐 주세요”라고 하면 대부분 망설
            이고 대답을 못합니다. 간혹 ‘몸 전체’를 가리키기는 분도 있습니다만 결국

            못 찾습니다. 이처럼 그 누구도 ‘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언어의 외침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아[나는 존재하지 않

            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언어의 외침뿐이라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나’에 대한 집착은 없애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손’이라는 명사가 지시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
            습니다. 그래서 ‘손’은 ‘나’와 다르게 틀림없이 존재하다고 합니다. 그런

            데 과연 ‘손’은 존재할까요? 제가 “그 ‘손’조차도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
            닙니다.”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라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상대는 손을 움직이면서 “자! 이처럼 움직이지 않는가? 한쪽
            손으로 다른 손을 만지면서 자! 이처럼 촉감이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여

            기에 손이 있지 않는가?”라고 주장합니다. 확실히 시각으로 파악하는 한
            에 있어서 혹은 한쪽 손으로 만지는 한에 있어서는 손은 있습니다. 이른

            바 시각 혹은 촉각으로 파악된 ‘손’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있는 것은 시각과 촉각뿐입니다. 바꾸

            어 말하면 감각의 데이터뿐입니다. 그 데이터에 대해서 그것을 ‘손’이라고
            언어로 말하고, 그 데이터를 ‘손’이라는 사물〔물건〕로 가공해 버린 것입니

            다. 그리고 가공된 ‘것〔물건〕’은 감각을 떠나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해 버
            립니다. 무반성적·상식적으로 손은 있고, 그것은 신체의 일부라고 언어

            로 생각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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