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6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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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것이 아니라 잘 흔들렸기 때문에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굵은 줄기와 많은 열매만으로 뿌리 깊은 나무를 말해
왔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잘 흔들린 과거사였는데 말입니다. 잘 흔들리
기 위해서는 행운도 따라 줘야 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심한 바람을 만
나 뿌리째 뽑힐 수도 있고, 부드럽게 흔들릴 조건이 아니어서 허리가 꺾
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일생은 흔들림의 연속입니다. 출생, 성장, 교육, 결혼, 취직,
노쇠, 병, 죽음과 같은 삶의 굽이마다 크게 흔들립니다. 그것이야 당연
한 일이겠지만 일상의 매순간도 흔들림의 연속입니다. 알람 벨과 ‘1분만
더’를 다투며 흔들리고,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흔들리고, 지하철 빈자
리 하나를 두고 곁눈질을 하며 흔들리고, 모처럼 가족 외식에서 메뉴판의
숫자 위에서 흔들리고, TV 리모컨 주도권을 가지고 흔들리면서 삽니다.
그래도 이 정도야 별 것 아니지요. 현실과 양심 사이, 감정과 이성 사이,
이익과 손해 사이에서 흔들릴 때는 한 보따리의 한숨과 탄식으로는 부족
합니다. 알 수 없는 전생 업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죽음을 생각하기도 합
니다.
살다 보면 속수무책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릴 때가 있습
니다. 시련이 나를 성장시킬 것이라는 긍정심리학의 가르침 따위는 별 소
용이 없습니다. 딱히 종교가 없는 사람도 하나님, 부처님을 찾습니다. 먼
조상까지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다고 안 될 일이 되고, 될 일이 안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쉬어
지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차라리
다음날 아침 눈이 뜨지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은 시간도 지나가게 마련이
고 또 어떻게든 살아가게 됩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말입니다. 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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