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7 - 고경 - 2019년 9월호 Vol.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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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라고 번역한 것이지만, 이것은 당신의 해석으로, 가령 그 해석이 옳다

            해도 역어로서는 적당하지 않습니다.”(舟橋<6>[4])
              이미 서술했지만, 이다파차야타의 직역은 ‘이것을 연으로 하는 것’이

            며, 여기에서 ‘유지연기’라는 역어는 나올 수 없다. 미야지, 후나하시가
            표명한 위화감은 당연하다. 이 ‘차此’가 한결같이 지분을 가리킨다는 전제

            를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상당히 어려운 의역인 것이다.
              더욱이 실용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만약 이 말이 채용되면, 12지연기

            10지연기, 5지연기, 3지연기 등 지분을 요소로 하는 각 연기를 총칭하는
            경우의 ‘유지연기’와 구별을 할 수 없게 된다. 분명히 적절성을 결한 역어

            일 것이다. 다행히 세월의 흐름 속에 자연히 사이구사의 안은 사라지고,
            차연성이라는 역어가 정착했다. 본서도 이 용어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하나의 일에 머물지 않고, 논전 전반에 걸쳐서, 사이구사의 ‘너무
            힘이 들어간’ ‘…에 이른’ 류의 표현이 눈에 띄고, 조금씩 정상괘도를 벗

            어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반의 지상紙上이라 해도 학자간의 학술적
            논쟁의 장에서, 왜 그는 이렇게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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