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1 - 고경 - 2020년 7월호 Vol.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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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를 열어 적극 참여를 유도하는 조치였다. 그리하여 수선사는 점차 지
식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교세를 넓혔는데, 다양한 계층의 지지는 결
국 최이崔怡 정권이 광범위한 지지층을 확보하여 정권을 확고히 하려는 의
도와도 부응되는 일이었다. 이후 수선사는 최이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으
로 고려 후기 불교계의 중심축으로 부상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과의 친
소親疎가 종단의 흥성과 몰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렇다면 진각 국사는 어떤 인물이며 차 문화가 극성했던 13세기 초, 그
는 어떻게 차를 즐겼던 것일까. 그 자취를 따라가 보자.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찬撰한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은 혜심의 생애를 어느 정
도 밝혀줄 자료이며, 혜심의 문집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역시 그의 차 생
활을 살필 수 있는 문헌이다. 「진각국사비명」에 의하면 나주 화순현 출신
인 혜심의 자는 영을永乙이고, 자호自號로 무의자無衣子라는 호를 사용했
다. 그의 생애에서 특이한 점은 태몽과 태어날 때의 정황인데, 이는 그가
범인과 달랐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태몽과 관련된 내용
은 「진각국사비명」에 상세하다. 내용은 이렇다.
“모친 배씨裵氏가 천문天門이 활짝 열려 보이는 꿈을 꾸고, 또 세
번이나 벼락 맞는 꿈을 꾸고서 임신하였으며, (그를) 열두 달 만
에 낳았다. 태의胎衣가 겹겹이 감겨 있어 마치 가사袈裟를 메고
있는 듯하였다. 아이를 낳자, 두 눈이 모두 감겨 있었는데, 7일
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매번 젖을 먹은 뒤에는 곧 몸을 돌려
모친을 등지고 누우니 부모가 괴이하게 여겼다.[母裴氏夢天門豁
開, 又夢被震者三, 因而有娠, 凡十有二月乃生焉. 其胞重纏, 又如荷袈裟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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