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2 - 고경 - 2021년 2월호 Vol.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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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후 진귀 조사에게 사사했다는 ‘진귀 조사설眞歸祖師說’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조사전 vs 독성각



           성리학도 남송의 주희(1130-1200)가 체계화했지만 조선에서 더 성황을 이
          루었듯이 조사선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중국보다 강한 법통의식과 함께

          조사전祖師殿과 같이 승가공동체를 위한 공간 말고도 신도를 위한 신앙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바로 독성각이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사상
          계는 불佛·유儒 모두 자존감만큼은 중국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독성신앙은 나한신앙의 일부이며, 조사신앙과도 연결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성각은 자력신앙을 선호하는 재가신도들을 위

          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사전과 독성각의 차이는 이용자만이 아
          니라 위치에서도 나타난다. 선종 도입시기에 가까울수록 조사전의 입지는
          ‘사찰 안쪽의 중요한 곳’에 승탑과 함께 건립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러한 현상은 점차 흐려지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주불전의 주변이면서

          도 안마당에 면하는 곳이나 조계산 송광사의 사례와 같이 주불전 바로 뒤
          쪽에 연관성이 큰 건물들과 한데 몰려 별도의 영역을 구성하기도 한다. 즉,
          이전보다는 좀 더 중심으로 다가온 것이라 볼 수 있는데, 분명 그럴만한 이

          유는 있었을 것이다.

           물론 부석사 조사당이나 불영사 원효전처럼 조사의 탑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시간도 한 참 지난 후에 세워진 건물들의 경우 신라 말 고려 초 승
          탑 옆에 있는 영당에 가까운지 아니면 조선시대 조사전에 더 가까운지 정

          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사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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