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7 - 고경 - 2021년 3월호 Vol. 95
P. 117

얼핏 생각하면 세계는 자신의 변치 않는 본질essence인 자성自性을 지닌
             존재자로 구성돼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건 진공 속을 고독하게 떠돌아다
             니는 천체의 세계에나 어울리는 세계관이다(물론, 이마저도 無常하다.). 우리는

             존재 이전에 본질이나 이데아가 상정되는 플라톤의 세계에 사는 게 아니

             다. 우리의 세계는 어떤 것도 그 스스로 존재하지 못 하는 무상無常과 무
             아無我와 무자성無自性의 연기緣起의 세계다. 그러나 진리는 너무나 많은 것
             에 가려져 있어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알아차리는 것이 지극히 어

             려운 일이어서, 부처님 이전에는 누구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꽃 피고 새 우는 空의 세계     의상 스님은 법성계法性揭에서 “참된 성
             품은 아주 깊고 지극히 미묘하니,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

             루어진다[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고 하셨다. 만일 우리의 세계가 자

             성만을 고집하는 존재자로 꽉 차 있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따분할 것인가?
               관성의 법칙이 성립하지만, 컵을 밀어야 움직인다. 컵을 밀어야 움직이
             는 바로 그 자리에서 관성의 법칙이 성립한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무자

             성無自性의 연기공緣起空의 세계에서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귄다.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바로 그 자리가 공空이다. 구름이 흘러가고 별이 빛나는 것
             은 이곳이 바로 연기緣起하는 공空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무비 스님이 강설
             하신 화엄의 4조 청량징관 스님의 「왕복서」 한 구절로 글을 맺는다.




               雖空空絶跡           비록 공하고 공하여 자취가 끊어졌으나
               而義天之星象燦然  이치의 하늘에는 온갖 별이 찬연히 빛난다.








                                                                         115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