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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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있습니까? 또한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남의 일이 아닙니다. 마음과 힘과 눈물이 있어
야 장차 감로수를 맛볼 것입니다.’)(사진 4)
순 한글의 명쾌한 해설, 생생한 그림 제시, 경전적 근거의 제시로 구성
하여 논리성과 가독성을 높였다. 이 글이 계속 지속되었다면 당시 독자들
에게 불교예술의 정수를 전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나, 1호로 종
결되고 말았다.
2호의 편집인인 백우용(1883-1930)은 「영산회상의 곡보를 역제譯製하면서
조선음악의 역사를 약술함」이란 글을 수록하였다. 영산회상을 오선지에
채보하면서 한국의 전통음악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그는 역사 자료를
충실히 제시하면서 한국음악사의 전체 구도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 글
은 상고시대(단군과 동이, 기자의 유곡遺曲, 고조선의 공후인)부터 중고시대(한·
예·부여, 종교 악무樂舞, 농공가무農功歌舞), 삼국시대(고구려, 백제)까지 기술하였
는데, 우리 문학사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고조선의 <공후인>, 고구려의 <황
조가>, 백제의 <지리산가><선운산곡><무등산곡><방등산><정읍> 등을 소
개하며 한국음악, 한국가요의 연원을 객관적으로 정리하였다. 미완으로
끝났기 때문에 본 논문의 주제인 영산회상에는 논의가 미치지 못하였다.
백우용은 한말 최초의 서양식 군악대원으로, 국내 최초로 양악군악대
를 창설한 독일 음악가 에케르트 밑에서 서양음악을 배웠다. 군악대 해산
이후 궁내부 장예원 양악대의 양악사장이 되었으며, 1915년 양악대의 해
산 이후 1928년 4월 이왕직아악부의 촉탁으로 위촉되어 아악의 5선보 채
보의 직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력을 볼 때 『불일』에 수록한 조선
음악사 관련 글은 연구의 초기 성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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