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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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정리되었으며,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사찰의 수적 추이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조선 전기 『신증동국여
지승람』이 편찬된 이후 『범우고』는 그 범례에 따라 편찬되었지만, 사찰만
을 수록한 것이나, 약 40여 년 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 누락된 39곳,
210여 개의 사찰을 보충하여 8도 328군현, 1,747사를 수록하였다.
이 수치는 일반적으로 불교 탄압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조선후
기 사찰의 감소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이왕의 연구 성과를 재검
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전기에 비해 후기 사찰 존
폐와 증감은 불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긍정적 변화를 대변해주는 것이
기도 하다. 그것은 전기에 존속된 사찰이 후기에 이르러 918사가 폐망한
것에 비해 후기에 창건되거나 새로 조사된 사찰 가운데 폐망한 사찰이 103
사인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범우고』에 나타난 이 수적 추이를 통해
조선왕조의 불교정책이나 불교계의 동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범우고』는 정조의 불교인식과 그 정책을 살필 수 있는 자료다. 정
조는 『범우고』의 제문題文에서 『범우고』를 짓는 까닭은 비구대중들이 깊은
산골짜기의 우거진 숲속이나 큰 늪을 진정시켜 예악·교화·풍속이 존속되
도록 힘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대체로 조선 후기 사찰에 관한 부연敷衍
설명에서는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에 스님의 국가 사회적 기여나 왕조의 번
영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가치를 인식한 것이다.
비록 집권 초기에는 배불정책의 태도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의승번전
제를 반감시키고 스님의 잡역을 금지시킨 일, 그리고 호국護國에 기여한 사
찰에 사액을 내린 일 등은 그의 호불정책이 맹목적인 것이 아닌 왕조의 유
지와 번영에 불교계가 기여한 점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범우고』의 편찬은 스님도 조선의 신민臣民이고, 왕조를 위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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