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1 - 고경 - 2022년 6월호 Vol. 110
P. 161

적’이라고 비판했다. 학계 전체가 이들 두 사람을 배제시키자 핫토리는 미
             키와의 논쟁뿐 아니라 종교 전반에 대해 침묵을 선택했다.



                다시 불교로 회귀



               핫토리의 침묵은 일본이 1945년 패전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었다. 패
             전 후, 핫토리는 자신의 시작점인 정토진종에 대한 발언을 하면서 침묵

             이 끝이 났다. 여기에는 학계로부터 사실상 퇴장 선고를 받은 미키 키요

             시가 「신란親鸞」(1945)을 발표한 게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핫토리의 복귀가
             지극히 사사로운 이유이지만, 그는 자신이 버렸던 집안의 가업, 혹은 자신
             의 뿌리로 돌아와 그 유명한 「신란 노트」(1950)를 발표했다.

               핫토리는 미키와의 이전 논쟁과는 달리, 미키의 신란론을 높게 평가했

             다. 여기에는 미키가 신란을 종래의 ‘호국사상가’로서의 시각을 탈피해 ‘
             인간’으로서의 신란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핫토리는 신란에게 입혀져 있
             던 신화성을 벗기고, 정토진종 교단과 분리시켜 인간으로서의 신란을 탐

             구했다.

               핫토리의 신란론은 동시대의 연구자
             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하기
             는 어렵다. 진종 오타니파大谷派 출신의

             아카마츠 토시히데赤松俊秀는, “핫토리

             씨의 신란에 대한 해석은 적절치 못한
             부분이 많다.”며 핫토리의 사료 해석 자
             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반면, 후

             타바 켄코二葉憲香는 “아카마츠 씨가 지                사진 4. 신란 노트(1950).



                                                                         159
   156   157   158   159   160   161   162   163   164   165   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