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3 - 고경 - 2022년 10월호 Vol.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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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켜왔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라
고 선언하였다. 말년의 저작인 『인심과 인생』
에서는 “종교의 진수는 오직 고대 인도에서 성
숙했던 불교에서 볼 수 있다. 그 도는 장차 공
산주의 사회 말기에 크게 성행할 것이다.”라
고 언급하였다. 이는 젊은 시절 “불교의 태도
는 국가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때
문에 내가 내심으로는 불교에 기울어져 있었
사진 5. 양수명의 『人心과 人生』.
지만 사회에서 불교를 숭상하는 풍조가 유행
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였던 태도와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5·4 신문화운동 시기의 문화 보수주의
1917년에 양수명은 채원배의 초청에 응하여 북경대학 교수 생활을 시작
하였고, 이는 7년간 지속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생각에 대해 다음
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처음 대학에 도착했을 때 채선생에게 그들
이 공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채선생은 우울한 목소리로 ‘우
리는 공자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나는 반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석가와 공자를 선양하는 일 이외에는 어떤 다른 일
도 하지 않겠다! 나의 이같은 행위는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지 맹목적
인 것이 아니다’고 말하였다.”
양수명은 이 시기에 불교와 유학 등 동양 전통철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북경대학에서 처음에 인도철학을 강의하였
고, 다음해에는 『인도철학개론』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계속 유학을 강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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