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1 - 고경 - 2022년 10월호 Vol.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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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 건국 후에는 정치협상위원이 되었고 사상적으
             로 비판도 받았다.
               양수명은 몽고족으로 광서성 계림桂林에서 태어

             났고, 이름은 환정煥鼎, 자는 수명漱溟과 초오肖吾이

             다. 그의 부친 양제는 청조 내각에서 천자에게 경전
             을 가르치는 담당관인 시독을 지낸 적이 있는데, 그
             자신은 신전통주의 진영의 중심 인물이었지만 흥미                      사진 2. 젊은 시절의 양수명.

             롭게도 자신의 아들인 양수명을 전통철학인 ‘사서오경’이 아닌 『지구운언地

             球韻言』으로 교육시켰다고 한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 아들 양수명에게 신교육을 시켰던 것일까? 이후 양
             수명은 7살 때 북경으로 보내져서 최초의 서양식 소학교에 들어갔다. 뒤에

             북경 순천중학으로 전입하였는데, 그곳에는 장신부, 탕용동 등이 공부하

             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 그는 인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기 시작
             하였는데, “그 당시 서양에는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행복주의, 실용주의,
             도구주의 등의 사상이 있었다. 그 학설을 자세히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사

             상으로 치면 내 생각은 우연히 서양의 공리파 사상과 맞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시기 그는 양계초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불교에 대한 이중적 입장




               양수명은 1913년 스무 살 때 처음으로 불교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는 매우 독실하여 채식만 하였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두 차례 자살을 시
             도하였다고 한다. 뒤에 유학으로 사상적 전환을 이루고 난 뒤인 29살 때

             결혼하였지만, 평생 채식만 하였고 불교에 대한 관심도 평생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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