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4 - 고경 - 2023년 2월호 Vol.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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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객춘무사病客春無事 병든 객이 봄날에 할 일 없어
공산주엄비空山晝掩扉 오는 이 없는 빈 산에 사립문을 닫는다.
세풍화편편細風花片片 살랑이는 바람에 꽃 이파리 낱낱으로 떨어지고
미우연비비微雨鷰飛飛 가는 비 오는데 제비들이 하늘을 난다.
물외소영욕物外少榮辱 속세 떠난 이곳에는 영욕이 적다마는
인간다시비人間多是非 인간세상에는 시비가 많구나.
백두감적막白頭甘寂寞 흰머리 늙은 몸이 적막함은 달게 받거니와
임하한지귀林下恨遲歸 속세 떠난 이곳에 늦게 돌아옴이 한스러울 뿐이다.
사실 백곡선사는 이미 세계지도인 ‘만국도萬國圖’를 보고 『시경』이나 『서
경』 그리고 그 많은 역사서 어디에도 실려 있지 않은 사실들에 놀라고, 공
자가 돌아다닌 천하라는 것도 지도상의 세계에 비하면 하나의 거품에 지
나지 않는 것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 정도로 당시 사람들의 논의가 얼마나
한심한 수준인가를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한심한 인간들아!’하고 목소
리를 높이기보다는 해야 할 말만 명징明澄한 목소리로 남겼다.
온갖 상념에 쌓여 터벅터벅 일주문을 나서는데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아 뒤돌아서서 미륵대불을 향해 정례頂禮하고 원願을 빌었다.
“미륵부처님, 부처님께서 오시기를 수억 년간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오
래 걸립니다. 지금 바로 이 세상에 나투어 이 중생들을 구해 주소서~.”
응답이 왔다.
“이 사람아, 자네는 헌법학자가 아닌가. 그러면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
여기’에서 답을 내놓아야지 자네까지 나에게 매달리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
가! 일모도원日暮途遠일세, 이 딱한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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