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0 - 고경 - 2023년 2월호 Vol.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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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유학자들도 다들 인정하였는
                                             데, 어설프게 유학 운운하며 백
                                             곡화상에게 대들어 끝장논쟁을

                                             벌일 만한 유학자가 과연 있었

                                             을까. 그래서 백곡선사를 ‘때려
                                             죽이자’고 한 말은 나오지 않았
                                             는지도 모른다.

                                               신익성  선생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할 수 없다고 하여
                                             그의 동생 동강東江 신익전申翊
                                             全(1605~1660) 선생과 함께 ‘척화

                                             오신斥和五臣’으로  찍혀  심양瀋

                                             陽으로 끌려갔으나 그에도 굴하
                                             지 않았다(사진 4, 5). 지행합일知
          사진 4. 신익성의 글씨.
                                             行合一의 모습이다. 그의 아버지

          는 영의정을 지낸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 선생이다. 백곡선사는 스승

          인 낙전당 선생의 이런 지행합일의 모습도 보았으리라. 백곡선사는 스승
          의 높은 학덕과 고매한 인품을 읊기도 하고 심양에 끌려가고 없는 스승의
          텅 빈 집을 지나면서 슬퍼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현종은 이 정직하고 치밀한 상소를 읽어보았다. 그날 이후 봉은사와 봉

          선사를 없애는 조치는 사라졌다. 그래서 봉은사와 봉선사가 살아남았고,
          더 나아가 이 땅에 불교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으리라. 역사의 이 장면
          을 살아낸 그들의 삶은 이렇게 치열했다. 그런데 1665년(현종 6) 화재로 봉

          은사의 전각들은 또 불타버렸다. 이듬해 백곡선사에게는 남한산성의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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