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3 - 고경 - 2023년 2월호 Vol.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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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주석했던 안심사, 공주
의 계룡산鷄龍山 신정사神定
寺(오늘날 신원사新元寺) 세 곳
에 나누어 세워져 있다. 그의
비문으로는 신익전 선생의
아들인 분애汾厓 신정申晸
(1628~1687) 선생이 지은 ‘백
곡처능사비명병서白谷處能師
碑銘幷序’와 영의정을 지낸 최
명길崔鳴吉(1586~1647) 선생
의 손자이자 당대 거유巨
儒인 명곡明谷 최석정崔錫
사진 7. 최석정의 글씨.
鼎(1646~1715) 선생이 지은
‘백곡선사탑명白谷禪師塔銘’이 있었으나 비로 세워지지는 못하였다(사진 7).
봉은사에 얽혀 있는 여러 역사의 장면을 생각하면서 지금이라고 인간들
이 다를까 하는 자문을 해 보았다. 봉은사를 세우고 내세의 복을 빌었던
선릉과 정릉의 무덤도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모두 파헤쳐져 현재 내
부에는 왕과 왕비의 시신은 없이 비어 있는 형편이다. 문정왕후도 이장까
지 한 남편의 능인 정릉 묘역에 묻히지 못하고 태릉泰陵에 묻혔다. 왕이
되어서도 친모에게 휘둘리며 살았던 명종은 강릉岡陵에 묻혀 친모 곁에
누워 있다. 사찰을 세우고 많은 공양供養을 올리며 내세의 복을 빌어도 소
원성취所願成就와 극락왕생極樂往生은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붓다가
무엇을 말했는지를 바로 보라! 직지直指! 아수라阿修羅의 인간세상에 대한
백곡선사의 생각이 엿보이는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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