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7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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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올바른 종지를 세웠으며, 교학의 벼리를 정돈하고 선의 벼리를 높이 들
             었으니, 조사의 도가 때를 얻은 것이리라!”라고 맺고 있다.
               그의 언설은 임제종의 양대 파 황룡파와 양기파 모두는 이렇게 해서 일

             본에 정착하게 된 것을 잘 보여준

             다. 이후 중국에서 양기파의 선
             승들이 도일하여 일가를 이루기
             도 하고, 엔니가 유학을 장려했

             듯이 일본의 선승들이 중국에서

             수학하여 그 토대를 튼튼하게 구
             축했다.  17세기  명·청  시기에
             은원융기隠元隆琦가 일본에 초빙

             받아 황벽종을 개창한 그 씨앗도

             이미 이 시기에 심어진 것이다.               사진 7.  쇼이치국사 초상. 키치잔 민초(吉山明兆, 1352
                                                  〜1431) 작.
             하나조노花園 왕이 하사한 시호
             쇼이치국사는 일본 최초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일생이 갖는 무게가 컸

             음을 반증한다. 고려 국왕이 법설을 요구할 정도로 엔니는 한반도에도 잘

             알려진 것 같다. 그의 법설은 『쇼이치국사어록』·『쇼이치국사법어』로 남아
             있다.
               엔니는 에사이가 그랬듯이 중국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차 덕분에 ‘시즈

             오카 차의 조祖’로 칭하기도 한다. 또한 우동 제조 때 밀분을 만들 수 있는

             제분기계를 송으로부터 들여왔다고 하여 ‘우동의 조祖’로 부르기도 한다.
             선문화의 수입은 단순히 수행체계로써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삶의 전파와
             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선문화가 생활문화에 뿌

             리 내린 일본불교 역사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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