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5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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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쇼이치 국사의 자필 유게遺偈, 동복사 소장.
조, 현밀체제顯密體制에 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학자 구로다 토시오[黒田俊雄]는 근·현대에 학계에서 강조되던, 중
세 신불교 우위의 학설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7, 8백여 년 전에 흥기한 신
불교가 중세 초기부터 맹위를 떨쳤다는 환상을 지운 것이다. 『일본 중세의
국가와 종교』(1975)에서 중세에는 여전히 밀교를 주축으로 하는 구불교 교
단이 국가와의 유착 속에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웠다. 즉, 밀교에 의한
진혼주술적인 신앙을 기반으로 보편적이고 절대적 종교의 세계관을 견지
했다. 이를 현밀체제론顯密體制論이라고 한다. 엔니의 쇼이치파는 이러한
객관적인 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동복사 교단은 한때, 주지는 다른 파와의 교류를 하지 말고 자파만을 유
지하도록 경계했다. 박학다식한 교의 설파와 뛰어난 변재를 가진 엔니에
게 왕과 무사들의 귀의가 줄을 이었다. 그 덕분에 쇼이치파는 70여 곳의
관사를 지정받았다. 이 외에도 다른 지역으로 파송되거나 초빙을 받는 일
이 잦아 교단의 명맥이 끊어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당시 왕이 주재한 교
토나 막부가 있던 가마쿠라의 선림은 시방주지제十方住持制를 통해 유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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