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6 - 고경 - 2024년 3월호 Vol.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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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를 종파를 가리지 않고 등용했기 때문이다.
일본 차와 우동의 시조로 추앙받다
열반을 앞둔 1280년 작은 병
세가 있었다. 상왕이 관의를
보내 보살피게 하였다. 차도가
있어 대중은 기뻐했다. 그러나
엔니는 “서리 맞은 잎이 잠시
떨어지기를 멈추었을 뿐, 어찌
사진 6. 쇼이치국사 서장,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래 갈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15일 후에 “본사 법당의 보화왕좌寶華王座에 올라가서 말후구를 설
하고 대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날이 되자 제자 무덴無傳이 왔다. 엔니가 헤어진 지 20년이 되었다고
하자, 제자는 겨우 19년이라고 대답했다. 엔니는 “네가 아직 꽉 찬 수를 모
르는구나!”라며 그날 밤에 열반하겠다고 했다. 시자에게 몇 시냐고 묻자,
“아까 닭이 울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붓을 들고, “중생을 이롭
게 하는 방편, 일흔아홉 해가 지났구나. 분명한 뜻을 알려고 했으나, 부처
와 조사가 전하지 않았도다.(利生方便 七十九年 欲知端的 佛祖不伝)”(『원형석서』제
7권)라고 쓴 뒤 붓을 던지고는 입적했다.
고칸 시렌은 기리는 말에서 에사이가 1190년대에 황룡일파를 이끈 것은
다만 길을 연 것일 뿐이며, 난계도륭이 도일하여 가르침을 펼쳤지만 임금
의 도성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혜의 해가 비추는 도는 임
금과 잘 어울렸고, 그 교화는 서울에 두루 미쳤다. 외부의 업신여김을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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