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4 - 선림고경총서 - 21 - 태고록
P. 234

234 태고록


            축 9월 21일에 스님을 낳았다.스님은 아이 때부터 뛰어나게 영민
            하였다.

               13 세에 회암사(檜岩寺)광지(廣智)선사에게 출가하여 19세에는
            만법귀일(萬法歸一)화두를 참구하였다.원통(元統)계유년에 성서
            (城西)감로사(甘露寺)에 머무르시다가,하루는 의심덩이가 깨어져

            게송 여덟 구를 지었는데 “부처와 조사,산하까지도 입이 없이 모
            두 삼켜 버렸네”라는 것이 그 끝 구절이다.
               그 뒤 지원(至元)정축년은 스님의 나이 37세였다.그 해 겨울

            에 전단원(栴檀園)에 머무르시면서 무자(無字)화두를 참구하다가,
            다음해 정월 7일 오경(五更)에 활연히 깨쳐 게송 여덟 구를 지었
            는데 “튼튼한 관문을 쳐부순 뒤에,맑은 바람이 태고에게 불어오

            네”라는 것이 그 끝 구절이다.
               3 월에는 양근(楊根)의 초당으로 돌아와 어버이를 모셨다.스님

            은 일찍이 1천7백 공안을 참구하다가 ‘암두밀계처(巖頭密啓處)’에
            서 막혀 지나가지 못하였다.한참 묵묵히 있다가,갑자기 깨닫고
            는 냉소를 머금고 한마디하였다.

               “암두스님이 활을 잘 쏘기는 하나 이슬에 옷 젖는 줄은 몰랐
            다.”

               신사년 봄에 한양 삼각산 중흥사에 머무르시면서,그 동쪽 봉
            우리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태고암’이라 하였다.그리고 영가(永
            嘉)스님이 지은 시의 문체를 본따서 노래 한 편을 지었다.

               지정 병술년,스님의 나이 46세였다.스님은 연도(燕都)에 갔다
            가 축원성(竺源盛)선사가 남소(南巢)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
            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스님은 다시 호주 하무산(霞
   229   230   231   232   233   234   235   236   237   238   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