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6 - 선림고경총서 - 21 - 태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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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짜여진 단필(段疋)가사 3백 벌을 내려 이 날 모인 스님네들에게
            주었는데,선교의 큰스님들로 법회는 전에 없던 성황을 이루었다.

               스님이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현릉은 “스승이 여기 있지
            않는다면 도를 저버리는 것이오”하였다.
               4 월 24일에 스님을 왕사로 봉하고 원융부(圓融府)를 세우고는

            거기에 정3품(正三品)의 장관을 두는 등,지극히 존숭(尊崇)하였다.
            광명사(廣明寺)에 있다가 그 이듬해에 왕사의 직위를 사양하였으
            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스님은 밤에 달아났다.현릉은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법복과 인장을 모두 스님께 보내드
            렸다.
               임인년 가을에는 양산사(陽山寺:현재 희양산 봉암사)에 머무르

            시기를 청하였고,계묘년 봄에는 가지산(迦智山)에 머무르시기를
            청하였는데,스님은 그때마다 다 응하였다.

               병오년 10월에는 왕사의 직위를 사양하고 인장을 봉해 돌리면
            서 자유로이 수도하기를 빌었다.현릉은 그 청을 따랐는데,그것
            은 신돈(辛盹)이 권세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앞서 스님은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에 대해 논하였다.
               “나라가 다스려지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얻고,나라가 위태로

            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왕께서는 살피시어 그를 멀리
            하시면 국가에 큰 다행이겠습니다.”
               무신년 봄에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머무르셨는데,신돈은 스님

            을 죽이려고 온갖 꾀를 썼으나 되지 않았다.그 뒤에 스님이 강남
            절강 땅에 가려 할 때에 신돈은 현릉에게 아뢰었다.
               “태고는 왕의 지극한 은혜를 입어 편안히 늙어 가는 것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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