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1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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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351
먼저 영사관 내 부지를 빌려 임시 불당을 만들어 포교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당시 거류민 자제의 교육기관이 없는 채 방임된 것을 보다 못
해 영사 및 유지와 상담한 결과 아동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영사의 무정(無情) (78쪽)
이리하여 1902년 2월 佐々木圓慰師가 西山師의 후임으로 목포로 와
서 교육사업과는 무관하게 포교에만 전념하였다. 하지만, 당시 영사 와
카마쓰 우사부로(若松兎三郞)氏는 영사관 내 임시 불당의 입퇴 명령을 佐
々木圓慰師의 상경 중에 갑자기 포교소로 전달했다. 佐々木師는 돌아와
이에 놀라서 본산에 보고하니 당시 교학부장 梅原讓氏는 목표 개교 이
래 막대한 경비를 투자하여 포교 및 교육에 전력을 경주하고, 일본인의
스승(師父)으로서 그 발전을 도모한 본원사의 성의도 무시한 영사의 망
은적 부덕의(不德義)에 분노하고, 곧바로 본존을 모시고 철수할 것을 명
령하였다. 하지만 佐々木師는 여러 신도 등과 협의한 결과 若松영사에게
는 포교소를 인양할 뜻을 통첩하고, 한편으로는 거류민회에는 영사의
이러한 태도를 힐문(詰問) 109) 하였다.
거류민회는 바로 총회를 개최하여 영사의 부덕의(不德義)함을 항의한
결과, 결국 영사는 거류민회장 高根信禮를 거쳐 이 부당의 명령을 취소
했다. 그러나 일단 사이가 뒤틀린 영사관의 부지에 그대로 포교소를 설
109) 나무라고 따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