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9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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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349




                      107)
                    敎)  가 오늘날처럼 풍요로운 것은 옛 한국의 유도, 계발에 의한
                    것이니라. 여기에 한국포교의 뜻이 있는 것이다.

                    즉, 작년 6월 14일 명을 받들어 상경하여 당국 대신 및 중요한 요직
                    의 지명인사를 방문하여 의견을 경청하고, 또한 보호를 구하였다.
                    제공(諸公)모두 크게 이를 찬성하고 또한 종래 승려의 무기력 비
                    굴 108) 함을 통렬히 비난하고, 이로 이번 일을 성대하게 각 이견을 개

                    진하고 전도(前途)를 독려하였다. 함경북도를 시작으로 점차 노경(露
                    境)에 이르려고 계획을 했지만, 近衛, 小笠原諸公이 먼저 이를 반대
                    하여 전라, 경상의 사이를 선택하는 것이 득책(得策)임을 지시받아
                    당국 대신도 이를 찬성함으로써, 이에 드디어 목포 부근을 목적지

                    로 삼고 시찰을 하기로 하였다. 동월 29일 교토 복귀를 명받고 다
                    음 달 15일 통역 岩下德藏과 함께 떠나 17일 부산에 들어와 伊集院
                    영사를 만나서 내지 여행권 및 한국감리(監理)가 발행한 포교시찰
                    특별보호장을 얻어 20일 지나[중국] 내지에 들어갔다. 그 90리의 산
                    천 14일의 날을 사용하여 지낸바, 경상에는 김해, 창원, 함안, 진해,

                    선녕, 진주, 사천, 곤양, 하동, 전라에는 광양, 순천, 낙안, 보성, 능
                    주, 남평, 나천, 무안의 18군, 대략의 지리와 인정(人情)을 시찰하고,
                    8월 2일 무사히 목포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시찰의 목적을 종료하

                    고 바로 그날 기선을 타고 부산으로 돌아가 영주를 위한 여러 준비
                    를 하여 다시 목포로 건너와 마침내 광주부를 최적의 땅으로 결정
                    하였다. 그리고 9월 22일 밤 2시 광주부에 들어가 지방장관찰사
                    보호를 청원했다. 당시 관찰사 尹雄烈은 15년 사변 때에 만난 인연
                    도 있고 하여 여러 시설 면에 있어 크게 편의를 제공하여 10월 12





               107) 교육이나 정치의 힘으로 백성을 착하게 가르치는 것.
               108) 강조볼딕은 원문의 강조점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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