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50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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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 『퇴옹학보』 제18집
일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서문 바깥 부동방(不動坊)에 집 한 채를 구
입, 이곳에 처음으로 영원 포교의 기초를 다졌다. 그 후 한국 사람
이 찾아오고 승속이 왕래하며, 또는 신도가 도항하여 학교를 설립
하고 상호 정의(情誼)를 쌓으며 매일같이 참배하고 가르침을 배우는
자 계속 끊이지 아니하고 오늘에 이른다……(이하 생략)
――포교사奧村圓心 통역岩下德戴記――
제8장 목포 개교 (77쪽)
포교소 설치
1897년 奧村圓心師가 광주개교에 앞서 개교지로 선정한 것이 목포였
다. 奧村師는 처음에 거류지 외룡당에 거처를 두고 개항의 기초를 다졌
지만, 아직 개항에 이르지 않았다는 그 당시의 상황과 현지인은 일제히
奧村師의 체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奧村師는 20일간 그 고통이
허망하게 목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02년 10월 1일 드디어 목포는
개항지가 되었고 이에 각국은 거류지를 경영하기 이르렀다. [목포에는] 히
사미즈 사부로(久水三郞)氏가 최초 영상로 부임하였다. 久水氏는 부임에
있어서 大限外相을 비롯하여 정부 요직 인물로부터 본원사의 개교에 후
원해야한다는 취지의 내명(內命)을 받았기에 당시 광주에 체재하고 있었
던 奧村師의 희망을 담아 목표의 개교에 찬성하였다.
1898년 3월 본산은 西山覺流氏를 포교소 설치를 위해 파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