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8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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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 『퇴옹학보』 제18집




               奧村師와 五百子는 한편 학교 건축에 착수하였는데 崔幹鎭씨는 자기

            집을 교실로 제공하는 등 奧村師를 위해 큰 후의를 베풀었다. 이리하여
            순조롭게 이상이 실현될 무렵 奧村師는 심신의 피로로 9월 중순에서

            11월 말까지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광주에 의사는 없고 의사를 구

            하기 위해서는 목포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를 위해서는 50원, 당시 奧村
            師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금액을 필요로 했다. 결국 의사를 데리고 오지

            못하고, 단지 약만 먹고 겨우 연말즈음에 일어났다.

               1899년 2월 포교상황을 보고 할 겸 奧村師는 광주를 떠났다. 奧村
            師의 후임으로 音羽玄哲師가 출장왔으며, 그 뒤 音羽師가 떠난 뒤 또 赤

            塚敬雄師가 뒤를 잇고 이렇게 하여 광주에 포교소 기초는 다져졌다.



               奧村師의 보고서 (73쪽)



               奧村師는 앞서 1898년 10월 본산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고서를 제

            출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살피는 데 참고가 되기에 기록해 둔다.




                 국가와 법은 가죽과 털과 같고 일본과 한국은 입술과 이와 같아서
                 이들 둘은 서로 기다려야 온전하게 갖출 수 있다. 깊이 생각건대 동
                 방의 형세가 날로 악화하고, 바야흐로 한국의 상태라는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가을 무렵 우리 왕법(王法)의

                 근본이 되는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가르침을 가지고 한국인들을 유
                 도(誘導), 계발(啓發)하는 것은 실로 우리 가르침의 본뜻으로, 국가에
                 보답하고 법을 수호하는 까닭인 터, 하물며 일본의 문물과 풍교(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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