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9 - 고경 - 2015년 12월호 Vol.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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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실천했을 따름이다. 아울러 결단과 실천에 대한 업을   님의 도력을 듣고 먼 곳에서 달려왔습니다. 한번 제접해

 고스란히 받았다.   주소서.” “지금 여기에는 그대도 없고 노승(老僧)도 없다”
 전자는 나라를 죽인 공으로 나라의 흥성을 맛봤고, 후  는 협산의 대답에 낙보가 할(喝)을 질렀다. 이에 협산이
 자는 나라를 사랑한 탓에 나라의 멸망을 방치하고 말았다.   혼쭐을 냈다. “그 입 닥쳐라. 까마귀 울음소리 따윈 걷어
 ‘한 티끌’에서 싹튼 세상의 양상은 이처럼 양면적이고 모순  치워라. 구름과 달이 하늘에 있는 것은 같지만, 산에서 보
 적이다. 또한 명분의 전리품은 소수에게만 집중되게 마련이  는 것과 계곡에서 보는 것은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이는 법

 다. 99%는 오늘도 똑같고 내일도 별 볼 일 없을 일상을 살  이다. 세상 사람들의 혀를 끊어버릴 순 있어도, 혀 없는
 아간다. 대다수의 촌부들에게 임금은 없어도 되는 존재이며   사람의 경계는 아득하여 미치지 못한다.” 낙보는 말을 잃
 빼앗아가지만 않으면 성은이 망극한 존재다.   었다. 협산은 그를 한 대 후려쳤다. 그때서야 낙보는 절을

 한편 ‘말을 드리운다’는 수어 (垂語)란 곧 상대를 은근히 떠  했다.
 보는 말이다. 권력의 무상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사들이
 겠으므로, 풍혈의 수어는 ‘궐기’의 의도로 여겨지진 않는다.   제접 (提接)은 깨달은 자가 깨닫고 싶어 하는 자를 가르치
 ‘의기투합’을 외치는 설두의 선언 역시 그냥 장난으로 보인  는 일이다. 강의가 아니라 상담에 가깝다. 선문답을 통해 깨
 다. “시골 노인 앞에선 조정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으니 이마  달았는지 평가하고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바로잡아주는 형식

 를 찡그릴 일이 없다(樂普元安, 낙보원안).” 한바탕 꿈 때문에   이다. 여하튼 ‘깨달음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낙보의 요청
 쓸데없이 칼을 가는구나.  에 ‘할 말 없다’며 협산이 물리는 모양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은 낙보다. 선객은 매사에 당당해

 【제35칙】   야 한다는 통념 때문에 절을 하지 않았고, ‘임제할’이 멋지
 낙포의 굴복(洛浦伏膺, 낙포복응)  다는 풍월 때문에 “할!”을 했다. 협산의 혼찌검은 매우 이성
          적이고 상식적이다. 세간을 모방하는 일이 우습듯 출세간을
 낙보원안(樂普元安)이 협산선회(夾山善會)에게 도를 물으러   모방하는 일도 볼썽사납다. 세상에 떠도는 이런저런 ‘구라’
 갔다. 그는 절도 하지 않은 채 뻣뻣하게 마주섰다. 건방지  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닭대가리를, 협산은 도저히 봐

 다는 투로 협산이 일렀다. “닭이 봉황의 둥지에 깃들이려  줄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에는 그대도 없고 노승도 없다”
 는 것이냐, 당장 나가라!” 낙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스  는 말은 서로 못 본 셈 치자는 핀잔이고 멸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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