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 - 고경 - 2016년 1월호 Vol.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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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는 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보경당이 크게 들어서 있는 자리의 앞마당에는 ㄱ자
의 명월당 건물이 있었고, 그 옆의 해우소를 돌아나가면 1층
의 목조창고에 유가의 목판이 1만장 넘게 보관되어 있었습니
다. 도견 스님이 주지를 하실 때 두 건물을 헐어버리고 지금
의 보경당을 지었는데 해인사 구광루 앞마당에서 보면 1층이
지만 극락전 쪽에서 바라보면 지하 1층의 콘크리트 150평의
건물과 그 위에 목조건물로 전각을 크게 지으니 지붕 높이가
마당에서 보면 명월당 시절보다는 2배나 높아져 기존 주변의
경관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때까지 해인사 일주문에 오르
기 직전에 직경 3m 정도의 영지 (影地)가 있었고, 거기에 가야
산 정상이 비치는 신령스런 곳이라고 다들 신기하게 생각했
는데 보경당 지붕이 높아지는 바람에 영지에 상봉이 비치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큰 못 형태로 개울을 막
아놓으니 전에는 영지에 상봉이 훤하게 보이던 모습이 지금
에서는 상봉이 못에 비쳐 보이기는 보이는데 전체가 아닌 주
봉이 잘려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일로 사중이 시끄러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는 규모가 큰 만
큼 요긴하게 쓰이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가야산 중봉에서 발원하여 퇴설당 옆으로 흘러 목공소를
지나가는 개울물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보광 스님이 강사로
오시면서 그곳을 막아 작은 못을 만들어서 겨울에 꽁꽁 얼
면 학인스님들이 신나게 스케이트를 타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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