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4 - 고경 - 2018년 9월호 Vol.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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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말할 때, 그냥 ‘힘들다’고 하지 않고 굳
이 ‘먹고 살기 힘들다’다고들 합니다. 비굴, 수치, 모욕 따위를 감수해야
경우는 대개 ‘먹고 사는’ 문제와 맞닿은 상황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 의식
주가 기본이지만, 음식의 곤궁이 가장 절박한 문제라는 얘기이겠지요. 정
치 집단이나 재벌가의 내분도 근원을 찾아가면 결국 밥그릇이 나타납니
다. ‘밥그릇’ 지키는 데 집요하기로는, 충분히 먹고 살만한 사람이라 하여
다르지 않습니다.
빈부 양극화 ― 마음 가난의 균질화
소비자본주의는 편의와 쾌락을 판매할 때 ‘공포’를 덤으로 줍니다. 한국
인이 보험료로 내는 돈은 1인당 연간 340만원이라 합니다.(2015년 기준, 한
겨레신문 2016.07.20) 집값 떨어질까 봐 공포에 떠는 건 집주인만이 아닙니다.
은행과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과 정부는 공포산업의 CEO입니다.
공포산업의 소비자인 우리는, 부자든 가난뱅이든 아등바등과 전전긍긍을
지불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공포는 끊임없이 생산되는 성공신화에 가려
져 유령처럼 떠돕니다. 유령은 실체가 없어서 더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 공
포는 빈자와 부자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부자들도 ‘먹고 살기 힘들다’고 편
안하게 앓는 소리를 합니다. ‘가난의 자연화’라고 이름 붙일 만한 현상입니
다. ‘경제적 양극화’가 엄연한 세상에서 이루어진 ‘가난의 (정신적) 균질화’입
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보다 지금이 더 각박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
입니다.
경제적 문제가 ‘먹고 살기’로 치환될 때, 가난에 대한 공포는 과장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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