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6 - 고경 - 2018년 9월호 Vol.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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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없습니다. 인간을 냉정하게―거의 동물과 똑같이―바라보는 진화생
물학자의 시선을 따르자면, 200만 년 전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먹이를 찾
아 헤매던 인류의 조상 때부터 이어온 본능적 반응일 테니까요. 굶주림에
특히 약한 인간의 생물적 약점도 한 몫 거듭니다. ‘사흘 굶어 담 안 넘을 놈
없고’, ‘열흘 굶어 군자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의미로든 먹고 사는 일은 어렵습니다. 삶의 비루함과 거룩함도 거
기에 달려 있습니다. ‘유미죽’이 부처님이 이루신 해탈의 선결 조건이었던
것처럼, 먹는 일로부터 자유롭지 않는 한 해탈은 무망합니다.
부처님은 ‘먹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먹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는 불교의 출가 사문뿐 아니라 걸식하는 바라문처
럼 떠도는 모든 수행자들에게 기꺼이 음식을 보시하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부처님
의 교단 구성원들이 스스로 음식에 대한 욕망을 통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앞서 살폈듯이 음식에 대한 욕망의 뿌리는 여간 질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
니다. 이리하여 세워진 대원칙은 하루 한 번 오전에 걸식하여 먹는 것입니
다.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어서는 안 됩니다. 먹고 남은 음식을 보관해서
도 안 됩니다. 주인 없는 나무의 열매라도 직접 따 먹어서는 안 됩니다. 부
처님께서는 음식의 맛을 즐기고 가득 배를 불리는 것을 경계하는 것에 머
물지 않았습니다. 작물을 길러 먹어서 안 되는 등의 규정으로 일체 생산 활
동을 금지했습니다. 무위도식을 장려한 것이 아니라 소유에서 오는 탐착
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 것입니다. 출가 사문이 생산 활동을 한다는 것은
재가 신도와 경쟁 관계에 놓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재 조계종단의 계율은 『사분율』에 근거하며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
입니다. 인간 욕망에 대한 해부학이라 할 정도로 신구의 삼업에 대한 지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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