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4 - 고경 - 2018년 9월호 Vol.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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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서는 쌍차와 쌍조가 다른 것이 아니라 쌍차가 곧 쌍조이고, 쌍조가 곧
           쌍차라는 중도의 원리를 설명한다. 따라서 둘 다 존재하는 구존과 둘 다 사
           라지는 쌍민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계의 세계, 화엄

           의 세계, 중도의 세계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해 있음으로 보고 들을 수 없

           는 심오한 세계이다. 하지만 그 법은 또 항상 보고 듣고 소통하는[恒通見聞]
           세계이기도 하다.
             여덟째, 법계의 본성이 원융性融해서 체니 용이니 하고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법계의 과果 속에는 모든 존재를 하나도 빠짐없이 통섭하고[統攝法

           界] 있으며, 과의 씨앗이 되는  인因까지 포함하고 있다. 인이 곧 과이고, 과
           가 곧 인이며, 인 가운데 과가 있고 과 가운데 인이 있다. 이런 논리는 부
           처가운데 보살이 있다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부처는 수행의 결과이고 보

           살은 부처가 될 씨앗을 심는 인위因位이다. 부처 가운데 보살이 있다는 것

           은 과果 가운데 인因이 있어 부처 가운데 중생과 마구니가 있다는 것이다.
             아홉째, 법계의 인因도 법계 전체를 빠짐없이 포섭하고 있다. 그래서 인
           속에는 결과로서의 과도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인이 곧 과이고, 과가 곧

           인이기 때문에 보현보살 가운데 부처가 있다[普賢中有佛]는 논리로 확장된

           다. 보현보살은 부처의 씨앗이 되는 인이며, 부처는 보살의 수행으로 성취
           되는 과이다. 그런데 인이 곧 과라면 보현보살 속에 부처가 있는 것은 마
           땅하다. 여기서 중생 속에 부처가 있다는 명제가 가능해지고, 진흙 속에 연

           꽃이 피고, 예토 속에 정토가 있다는 설명이 가능해 진다.

             결국 부처 속에 보살이 있고, 보살 속에 부처가 있다는 것은 부처와 보
           살이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는 인식을 해체한다. 부처와 보살, 부처와 중
           생은 별개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되는 차원에 있다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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