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고경 - 2018년 12월호 Vol.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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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위안을 주고받으면서 말입니다. 최고가 되기 위
한 노력을 최선으로 착각한 것이지요.
최고는 제 아무리 높아도 상대적입니다. 최선은 절대적입니다. 최고가
지향하는 것이 목표라면, 최선이 지향하는 것은 가치입니다. 우리는 최고
를 최선으로 착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떤 최고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비록 결과가 초라할지라도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모두 선
한 최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돌아볼 겨를 없이 살아온 까
닭이겠지요. 최고가 되고자 하는 서로의 욕망을 무한 승인하면서 최선의
진정한 의미에 눈을 감아버렸다고 해야겠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최선이라는 말은 진정한 최선과는 거리가 멉니
다. 한 가지 예만 더 들어 보겠습니다. (싸잡아서 우리라고 말해서는 안 되지만)
부동산 투기에도 우리는 얼마나 최선을 다했습니까. 진정한 최선을 위해
서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감히 말하자면 ‘실패할 용기’겠지요. 동
기와 과정이 옳다면 실패도 감수하겠다는 용기.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실패에 너무 가혹하다고, 그 흔한 구조적 문제를 변명거리로 들고
나올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 글의 취지를 생각하면 안
될 말이겠지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전쟁터의 윤리가
요구되는 오늘입니다. 아득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살아야겠
지요. 정녕 최선을 다해서.
『법화경』 「서품」의 한 대목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문수보살이 미륵보살
을 비롯한 대중들에게 『법화경』이 설해질 것임을 밝히는 대목입니다.
“선남자들이여, 한량없고 가없는 불가사의한 아승지겁 전 과거
에 부처님이 계시었으니, 그 이름은 일월등명여래·응공·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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