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1 - 고경 - 2018년 12월호 Vol.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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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은 『탐현기』에서 ‘연기상유緣起相由’ 즉 서로 조건이 되어 발생하는
존재의 원리를 열 가지 주제로 설명한다. 성철 스님은 이 중에서 이문상입
의異門相入義, 이체상즉의異體相卽義, 체용쌍융의體用雙融義라는 세 가지 주제
를 선별하여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이들 원리만 제대로 이해해도 존재의
연기적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파도가 부셔져 바닷물이 되듯
이번 호에 살펴볼 내용은 ‘이체상즉異體相卽’에 관한 것이다. ‘상즉相卽’이
란 서로 다른 두 개의 사물이나 현상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체상즉이란 서로 다른 개체들의 몸[體]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화엄에서 ‘상입’이나 ‘상즉’은
하나[一]와 전체[多]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전체와
다르지 않고, 전체는 하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체와 전
체가 둘이 아닌 이체상즉에 대한 법장의 설명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모든 연緣이 서로 바라보면서 서로의 모습을 빼앗는 것이다. 모
든 존재들은 나와 너로 단절되어 있지 않고 서로의 모습을 박탈한다. 예를
들어 홍시는 토양의 성분을 빼앗아 홍시로 만들고, 토양은 다시 홍시의 형
상을 빼앗아 흙으로 변화시킨다. 법장은 파도의 비유를 통해 서로의 모습
을 빼앗는 원리를 설명한다. 파랑이 일어나는 바다에는 쉴 새 없이 파도가
친다. 먼저 밀려온 파도와 뒤에 밀려온 파도는 서로 다른 파도다. 하지만
철썩하고 부서지는 순간 이 파도는 저 파도의 형상을 빼앗고, 저 파도는 이
파도의 정체성을 박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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