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고경 - 2018년 12월호 Vol.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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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각자 상대의 형상을 빼앗아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것
           이 상즉相卽이다. 이렇게 상즉이 되려면 나는 너라는 형상을 뺏어야 하고,
           너는 나라는 특성을 뺏어야 한다. 그리하여 나도 사라지고, 너도 없어지는

           ‘서로 빼앗음’ 즉 ‘상탈相奪’이 될 때 이 파도와 저 파도라는 개체의 울타리

           는 해체되고 바닷물이라는 전체성이 드러난다. 본래 이 파도도 바닷물이
           고 저 파도도 바닷물이다. 그럼에도 ‘나’라는 상相을 갖고 너를 차별하고,
           ‘너’라는 상을 갖고 나를 배제하는 것이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상탈은 그와

           같은 차별과 변견에 사로잡힌 개별적 형상을 박탈함으로써 독립적 개체라

           는 허구를 깨고 전체성의 진실을 드러낸다.
             둘째는 유체有體와 무체無體라는 특성이 있어야 연기가 성립된다는 점이
           다. 지난 호에서 이문상입을 말할 때는 작용의 관점에서 논했음으로 ‘유력’

           과 ‘무력’으로 설명했다. 여기서는 체의 관점에서 논하기 때문에 유체와 무

           체라는 체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파도라는 몸[體]이 있으려면 바닷물이라
           는 몸은 무無가 되어야 한다. 파도라는 개별성은 성립되고, 전체로서 바다
           라는 특성은 숨어야 한다. 반면 바닷물이라는 전체성이 드러나려면 파도

           라는 개별적 형체가 뒤로 숨어야 한다. 하나의 색色이 드러나려면 다른 형

           상은 공空이 되어 숨고, 공이 드러나려면 색이 숨어야 한다. 색과 공의 이
           런 조화가 있기 때문에 연기의 법칙이 성립된다.
             셋째, 하나의 조건이 있기 때문에[得此一緣] 그로 인해 모든 관계가 성립

           [一切成起]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조건 중에 단 하나의 조건[緣]이라도 빠지

           면[若闕一緣] 다른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연기의 원리
           는 깨지고 만다. 예를 들어 시계는 수많은 부품들이 맞물려 돌아간다. 수
           많은 톱니바퀴들이 한 치의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야 시간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런 톱니바퀴에서 하나만 빠져도 시계라는 메커니즘은 작동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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