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고경 - 2018년 12월호 Vol.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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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이다.
             ‘나’라는 ‘하나의 조건[一緣]’에 의해 우주가 돌아감으로 무수한 존재들은
           ‘무체無體’가 되어 숨고, 나는 무수한 존재와 작용을 만들어 냄[一能作多]으

           로 ‘유체有體’가 되어 전면에 등장한다. 이 때 다른 모든 존재들은 장막 뒤

           에 숨어 있고 오로지 나 홀로 주인공 노릇을 한다. 하나가 주체가 되고, 여
           럿이 객체가 될 때는 여럿은 무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하나가
           모든 것을 짓고 움직이게 함으로 결국 하나의 개체만이 유일한 유체가 된

           다. 이렇게 보면 온 우주에서 오직 나 홀로 우뚝 솟아 있으며, 모든 것은 나

           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하고 많은 존재들은 오로지 나를 위해 존재하며, 우
           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것은 나 하나만 우주의 주인공이고, 다른 모든 존재들은 객체

           이고 절대 무라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물론이고 나 밖에 존재하는 다른 모

           든 존재들도 모두 나와 같은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나와 남은 주인공인
           동시에 손님이고, 손님인 동시에 주인공이다. 그래서 법장은 “여럿 아닌
           하나가 없으며[無有不多之一], 하나 아닌 여럿이 없다[無有不一之多].”고 했다.

           세상의 모든 하나는 온 우주의 조화와 협력 때문에 존재하고, 온 우주 역

           시 각각의 개별자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이 조화를 이
           루려면 온 우주가 오로지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그때는 온 우주
           가 하나의 개체를 유일한 존재인 듯 돋보이게 하고 다른 존재들은 뒤로 숨

           는다. 그것이 하나를 의지해 온 우주가 드러나는 이치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를 앞세우고, 나머지가 뒤로 숨으려 하지 않는다. 모
           두가 다 주인공이 되어 전면에 나서려고만 한다. 하지만 모두가 동시에 주
           인공이 되려면 아무도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주인공은 전체와의 조화 속에

           서 전체의 양보와 배려 속에서 탄생한다. 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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