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8 - 고경 - 2019년 1월호 Vol.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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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기억”으로서의 반성과는 다른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증분과 증자증분을 반영과 반
           성에 의해 명시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하고 있지 않다.

             어쨌든 자증분도 지향적 작용이라고 보는 이조 케른의 견해를 수용하

           면, 현상학적 반성이 지향성을 떠난 반영적 앎에 가깝게 될 수 있다는 아
           마데오 조지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으로부터 하나
           의 중요한 사실이 역설적으로 알려질 수도 있다. 곧 분별적 반성이 아닌 무

           분별적 반성은 반영에 가까운 반성일 수 있고, 지눌이 의도하는 반조도 바

           로 반영에 가까운 무분별적 반성일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지눌은 반조가
           진심과 망심을 변별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변별은 서술을 목표
           로 삼아 다양한 의식작용들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므로 분별적 반성이 아

           니다.



             4. 반조는 쥐들이 출몰하는 어두운 광에 빛을 비추는 일로 비유된다. 빛
           이 비추어지는 동안에는 광에 쥐들이 출몰하지 못한다. 증자증분이 견분

           을 반조하는 동안에는 견분에서 망념적 분별이 출현하지 못한다. 물론 반

           조하는 동안에도 가끔은 망념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것은 반조의 진행 중
           에 반조가 잠시 중단되어 망념이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망념
           이 반조의 능력을 이겨내면서 출현한다는 것은 아니다. 태양빛이 빨래를

           오래 비추면 빨래의 색깔이 탈색되듯이, 반조가 오래되면 망념은 출현할

           힘을 상실하고, 또한 의식 저편에 숨어 잠재의식으로 머무는 망념의 종자
           도 점차 힘을 상실한다. 반조는 견분에 빛을 비추어 망념의 출현을 막고 또
           잠재적 망념의 힘을 탈취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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