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2 - 고경 - 2019년 3월호 Vol.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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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겉모습이 부처이니까 무슨 소리를 해도 다 거룩
한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겉모습이 중생이라고 해서 무슨 소리를 해도
다 번뇌에 오염된 잡소리는 아니다. 비록 겉모습이 부처일지라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소리를 한다면 중생일 뿐이다. 반대로 겉모습이 중생일지
라도 바른 진리를 말한다면 그것이 곧 부처님의 설법이다. 따라서 겉모습
이 부처냐 중생이냐가 아니라 그 마음이 부처냐 중생이냐에 따라 부처와
중생이 결정되며, 설하는 내용에 따라서 부처와 중생이 결정된다. ‘자성
에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고, 자성을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라는
『단경』의 가르침도 이런 맥락의 가르침이다.
모두 긍정하고 모두 부정하기
마찬가지로 지체 높고, 많이 배운 교수나 선생이 하는 말이라고 해서
다 참은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오염되어 있다면 그 말이 아무리 품위 있
고 고상해도 사악한 언어일 뿐이다. 반대로 비록 못 배우고, 허드렛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순수하고 바르다면 그 표현이 거칠
고 말이 어눌해도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
에 따라 부처와 중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마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금강경』에도 32상이라는 외형적 특성으로 부처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겉으로 드러난 형상으로 부처를 보고자 하
거나, 품위 있고 세련된 목소리로 부처를 찾는다면 오히려 삿된 도를 신
봉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차별상을 전복함으로써 부
처와 중생을 평등하게 긍정하는 것이 설청전수의 세 번째 가르침이다.
넷째, 부처와 중생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부처라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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