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0 - 고경 - 2019년 3월호 Vol.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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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서문도 좋다고 하였다. 8)
『중론』 등의 서문을 지은 승예
종래 학계에서 삼론학자로서 승예僧叡를 과소평가한 면이 있었다고 보
는 견해가 있다. 그것은 승조처럼 뛰어난 저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
고, 학계에서 충분히 조명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론
학을 대성한 길장은 구마라집의 3천명 문도 중에 (가장 뛰어나) 입실入室한
9)
사람은 오직 8명이고, 그 중에 승예僧叡가 수령이었다 고 하였다. 그리고
근래의 연구자들 중에는 승조와 승예를 구마라집 문하의 제일인자로 보
는 학자도 있고, 승예를 구마라집 문하 삼론연구의 제일인자로 보는 학자
10)
도 있다. 대품과 소품의 반야경과 『중론』·『십이문론』·『대지도론』의 서
문을 승예가 지운 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평가한 것이다. 승예가 제일가는
삼론학자라는 근거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해 본다.
① 물론 알려져 있듯이 승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에는 승조처럼
삼론학 분야의 단독 연구서를 저술하여 남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승
예를 구마라집 문하 중에 제일인자라고 간주하는 일차적인 이유를 서문
의 작성에서 찾고 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반야경과 중관학의 경론 대부
분의 서문을 지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승예다. 곧 반야경 중에 『대품반야
8) 吉藏, 「百論序疏」, “百論有二序 一叡師所制 二肇公小作…又叡師序是弘始四年前翻 什師初至方言未融
爲此作序猶未中詣 肇師序卽是此文六年重翻 文義旣正 作序亦好” (T42-p232a)
9) 吉藏, 『中觀論疏』 제1권 本, “門徒三千 入室唯八 睿爲首領 老則融睿 少則生肇” (T42-p1a)
10) Richard H. Robinson, Early Mādhyamika in India and China, Chap. Ⅴ, Seng-jui, Motilal
Banarsidass, Delhi, 1978. 平井俊榮, 『中國般若思想史硏究』, 제2장 僧叡, 東京 春秋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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