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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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3~1125)라는 스님이 평을 달았다. ‘공안’이란 원래 당시 중국 당나라 정
부가 펴내던 공문을 가리킨다. 곧 선종에서 쓰는 공안은 ‘공인된 화두’라
는 뜻이다. 법칙을 일컫는 ‘칙則’이라고 낱낱의 화두를 명명한 까닭 역시
그 화두가 그만큼 객관성과 정통성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인생의 진리를
깨우치자고 뛰어드는 것이 수행이니, 결론적으로 공안만 잘 이해해도 세
상살이의 견딤이 한결 수월해질 수 있다.
언어란 것은 자못 신비한 구석이 있는데, 언어를 줄이면 줄일수록 더
농익고 폭넓은 의미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른바 여백의 아름다움 또는
함축의 묘미. 좋은 시들은 이 기법을 능란하게 활용했기에 명시 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선사들은 특출한 도인인 동시에 특출한 시인인 경우가 제
법 있다. 『벽암록』이 그렇다. 문학적 은유와 상징의 결정판이다. 오죽하
면 원오의 제자이자 간화선을 체계화 시킨 대혜(大慧, 1089~1163)는 후학들
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역작을 불살라버리는 소동을 벌였을까. 직접적인
체험과 도전으로 깨달음에 다가서려지 않고 그저 그럴듯한 말꼬리나 붙
잡고 허송세월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대혜가 간화선을 만든 까닭은 그
즈음 사대부 문인들을 중심으로 술 한 잔 걸친 채 선시禪詩 쓰기나 겨루는
문자선文字禪이 횡행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주(趙州, 778~897)는 그러한 대혜가 가장 싫어했을 법한 인물
이다. 『벽암록』 100칙이란 ‘100가지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역대 선
사들의 일화와 법문을 소재로 삼았다. 이 가운데 조주를 주인공으로 한
것이 12개로 최다最多에 자리한다. 그의 혀에서 나온 선문답은 도합 550
개에 달한다. 특히 ‘개에겐 불성이 없다’는 조주구자趙州狗子는 그의 사후
11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선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두로 손꼽
힌다. 후대는 조주의 선을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기린다. 그만큼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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