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고경 - 2019년 4월호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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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입으로 잘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달변은 아니었다. 선문답에서 조주의 답변은 길어도 스무
글자를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다. 툭툭 내뱉는 말을 잘 한다고 해서 말을
잘 한다고 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다만 언어의 주요한 기능으로 감화感
化가 꼽힌다. 조주에게 말을 걸어오는 자들은 대다수가 승려이며 그러므
로 깨달음이 무엇인지 불법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늘 궁금해 하는 자들이
다. 조주는 그때마다 번뜩이는 직관과 비약으로 그들의 마음을 크게 들었
다 놓았다. 그의 말은 언제든 막힘이 없으며 쩔쩔매거나 중언하거나 곤경
에 처하지도 않는다. 마치 인생 다 산 사람처럼. 더는 내려갈 곳이 없다는
사람처럼.
조주석교를 실제로 구경한 적이 있다. 어느 종단이 한국의 불교전통의
식을 중국 스님들에게 보여주러 가는 길에 동행했다. 조현趙縣은 허베이
성河北省 소속으로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에서 서남쪽으로 1000리쯤 떨어
진 마을이다. 조주가 거주했던 백림선사柏林禪寺와 그가 왕래했던 조주석
교趙州石橋는 조현에서 가장 이름난 명승지다. 도심 속의 백림선사는 웅
장하고 견고했다. 당나라 최고 선승의 조정祖庭이었다는 명성 그리고 뭐
든지 크게 만들고 보는 대륙적 기질이 결합한 대가일 것이다. 높이 33m
의 조주 사리탑이 압권이다. 대법당에는 2,000명까지 들어간다. 경내에
는 수십 그루의 측백나무가 가지런히 도열했다. 그래서 백림이다. 선사의
유명한 화두인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조주백수)’에서 착안한 식목이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天下趙州천하조주’라고 쓴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조주석교는 백림선사에서 4km 남짓 떨어져 있다. 택시로 10분을 달리
니 다리가 보였다. 조주가 맹랑한 학인과 입씨름을 벌였던 그 다리요, 나
귀도 건너가고 말도 건너간다는 그 다리다. 선문답 안에서 학인은 조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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