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2 - 고경 - 2019년 8월호 Vol.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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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보며 남전화상은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는 죽
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남전화상은 조주의 수행이 무르익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대목이다.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가는 행동이 어떤 메시지
를 담고 있는 것인지 필자는 모른다. 분명한 건 남전화상은 조주의 행동
을 칭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행동은 평소 수행을 얼마나 치열하게 해
왔는지에 대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를 남전화상은 정확히 읽고 있다. 다
른 제자들이 조주처럼 수행의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면 고양이 새
끼의 죽음을 말릴 수 있었으리라.
과거 세간에 ‘지못미’라는 젊은이들 사이에 쓰이는 말이 있었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의 압축된 표현이다. 실제로 지켜주지 못해 미
안한 사례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화냥년’이
라는 비속어다. ‘화냥년’은 본래 ‘환향녀還鄕女’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향에
돌아온 아녀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본뜻을 폄훼하고 왜곡해서 ‘함부
로 몸을 놀리는 여자’로 변질시켰다. 원인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실과
백성들에게 있었다. 서기 1636년 우리나라를 치고 들어 온 청나라로 인
해 병자호란이 일어났지만 우리 땅을 지키지 못한 당시 조선은 처녀와 아
낙 등 수천 명을 인질로 내줘야 했다. 그 후 인조 13년 청나라에 끌려갔
던 아녀자들이 돌아온다. 고향 땅을 밟는 이들을 ‘환향녀’라 부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일부 조정 대신과 남성들은 그녀들을 따스하게 받아들
이지 않고 ‘몸을 팔고 온’ 기생 정도로 여겨 도성 땅을 밟는 입구에서 단체
로 몸을 씻게 하는 등 마치 속죄라도 하라는 양 파렴치한 행태를 보였다.
사정은 일제 시대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라를 지키지 못해 벌어진 사
안 중의 하나가 위안부 사건이다.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대가는 국민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위안부는 나라 잃은 설움과 비애를 상징한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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