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4 - 고경 - 2019년 8월호 Vol.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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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당사자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일부 국민들의 의식과

           행태를 보고 있자면 화가 난다.
             ‘지못미’는 우리의 역사에서 숱하게 반성하고 시정해야 할 과제를 시사

           해주고 있다. 자신의 과오가 무엇인지 모른 체 남에게 손가락질하고 수모
           와 냉대를 일삼는 행태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살생을 죄 중 으뜸으로 치는 불가에서 남전화상이 고양이의 목을 벤
           것은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 여기에 고양이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

           한 양당의 승려들은 무엇을 말하지 못한 것일까? 공안은 파격과 역설의
           언어다. 도를 구하는 문턱에서 자비심을 논하는 따위란 없다. 남전화상이

           양당의 승려에게 말하려는 메시지는 갑론을박의 시비를 고양이의 목을
           베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고양이를 지켜주지 못한 양당 승

           려의 허약한 법력을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내가 지켜줘야 할 수많은 요소와 상황들이 놓여 있다.

           그럼에도 꼭 지켜줘야 할 것을 내 나약함과 어리석음과 비겁함으로 말미
           암아 결국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지켜줘야 할 것이 있다면 사력을 다 해 지켜주는 것이 참된 도리다. 부모
           가 자식을 지켜주지 못하고 스승이 제자를 지켜주지 못하며 사장이 직원

           들을 지켜주지 못하면 사회의 일탈과 불화가 가중될 수밖에 없다.



             죽은 고양이 위해 부고장 돌린 오상순



             이런 얘기를 할 때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현대문학의 거장 공초空超
           오상순(1894∼1963)이다. 그에게 이런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공초가 대구

           시 덕산동에 살 때 친구들에게 자기 딸이 죽었다는 부고장을 돌렸다.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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