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9 - 고경 - 2019년 8월호 Vol.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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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했다.

              이 때 현장의 관심을 끈 경론은 유식唯識을 다룬 무착無着의 저작이었
            다. 하지만 당시까지 무착의 저서는 일부만 번역된 상황이었고, 번역도

            체계적이지 못했다. 이에 현장은 불교학에 대한 의문을 풀고, 불교에 대
            한 학문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

            거한 연구가 필요함을 절감한다.
              불교원전에 대한 이런 갈증은 현장만의 일이 아니라 진리에 목마른 수

            많은 승려들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중국 근대의 불교학자 양계초梁啓超에
            따르면 4세기부터 약 4백 년 동안 인도를 다녀온 승려들 중 이름이 알려

            진 인물만도 169명에 달한다고 했다. 나아가 7세기 경 의정義淨이 쓴 『대
            당서역구법고승전』에 따르면 그가 책을 집필할 당시 약 50년 동안 57명

            의 승려들이 구법을 위해 천축으로 떠났다고 기록했다. 구법승들의 열정
            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은 구법승들의 출국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현
            장이 구법여행을 계획할 당시는 당태종 이세민이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으

            로 불리는 정변을 통해 황제로 등극한 직후였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
            쟁을 통해 등극한 태종은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대외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그 첫 조치가 당나라에 위협이 되던 북방의 돌궐에
            대한 총공세였다. 이를 위해 국경지대에는 비상령이 선포되고 엄격한 통

            행금지가 시행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장과 그의 도반들이 제출한 출국요청은 거절되

            고 말았다. 그러나 진리를 향한 현장의 열정을 세속적 권력으로 막을 수
            없었다. 현장은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629년 서천西天을 향해 길을 떠

            났는데, 당시 현장은 28세의 패기만만하던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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