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고경 - 2019년 9월호 Vol.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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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존상에 수용된 이래 아미타여래상이나 약사여래상에도 수용되었다는
설과, 석가여래가 마왕으로부터 항복을 얻은 깨달음의 순간을 상징하는
것처럼 병마를 항복시켜야 하는 약사여래에게도 신라인들이 적용시킨 것
이라는 견해가 있다.
항마촉지인이 변형된 독특한 약사여래상의 수인은 『약사유리광여래본
원공덕경』에 근거한다. 즉 약사여래의 이름만 들어도 모든 병환이 치유되
고, 어리석음이 격파되며, 번뇌가 없어지는 까닭에 한 손은 마군이나 병
마를 격파하고, 한 손에는 약을 가지고 병환을 치유하는 것을 가장 큰 바
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짓고, 왼손에
는 약기를 올려놓은 약기인藥器印을 짓는 것이 약사여래의 수인으로 정착
되었던 것이다(사진 7).
둥근 보주寶珠를 든 약사여래상
우리나라에 유행한 약사신앙의 형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시대는
통일신라시대이다. 약사신앙이 신라에 도입된 것은 선덕여왕 때 밀본법
사가 『약사경』을 독송하여, 선덕여왕의 병을 치료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어 약사신앙이 성행했던 것은 통일신
라 때 조성된 많은 약사여래상을 통해 알 수 있다.
단독의 상 뿐만 아니라 경주 남산 보리사 석불처럼 석가여래좌상 광배
뒷면에 표현되기도 하고 불탑과 경주 남산 칠불암처럼 사방불로 표현된
경우도 있다. 이 가운데 경덕왕(재위 742-765)이 백률사에 행차할 때 땅 속
에서 염불소리가 들리는 곳을 파 보았더니 사방불이 새겨진 돌이 발견되
어 창건했다는 경주 굴불사 터의 동방 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상은 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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