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고경 - 2019년 9월호 Vol.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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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많았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렇듯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새겨진 그 이면에는 김유신의
비애도 엿볼 수가 있다. 그것은 김유신의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다. 몰락
한 가야계 후손으로서 골품제가 분명한 신라 사회에서 세력을 만들어 간
다는 것은 웬만한 노력과 기회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태
종춘추공 조의 처음을 장식한 누이의 스캔들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김
춘추 역시 진흥왕의 아들 진지왕의 손자로서 별탈이 없었다면 정통 성골
로서 무난히 왕위를 이었을 것이지만 진지왕이 4년 만에 폐위됨으로써
진골로 강등되고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진평왕 쪽에 밀리게 된 처지, 하
지만 여전히 가능권 안에 든 인물이었기에 잠룡潛龍인 춘추와의 연은 김
유신에게 기회였던 것이다.
신하로서 왕이 된 사나이
진덕왕 조에서 드러나듯 김유신의 영향력은 선덕여왕 사후 차기 대권
계승 순위에 오른 상대등 알천을 낙마시키고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을 추
대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비담의 난 등으로 정국이 혼란한 시기였으
며, 이를 진압함으로써 김유신과 김춘추는 각각 군사, 외교 등 분야의 권
력을 장악한 사실상의 실세가 되었다. 이후 이 두 사람의 유착관계는 김
유신의 두 누이가 김춘추의 부인이 되고, 또한 김춘추의 딸이 김유신의
부인이 되는 중첩된 혼인관계로 더욱 공고하게 된다.
가문을 일으키고 지키고자 했던 김유신의 열망은 미추왕과 죽엽군 조
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연 스님은 그를 통해 사후에까지 떨친 위
엄을 나타내려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젊은 시절 천관녀와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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